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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 중 하나를 고르라면, 지금껏 남의 부탁을 어지간하면 거절하지 않고 들어준 일이다.
기본적으로 누군가를 돕는 걸 싫어하지 않는 성격이라 할 수 있는 여유가 되면 승낙하고 할 수 없으면 거절한다는 기준을 따르고 있었는데. 앞으로는, 이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 상대방에게 유익이 될 것인지 해가 될 것인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새롭게 배운 계기가 있다.
내가 아는 일본인 목사님이 코로나가 아직 기승일 무렵 교단의 일 관계로 한국에 올 계획이었으나 전자도항서라는 걸 미리 작성하지 않은 탓에 출국이 거부되어 다음날이 되어서야 출국을 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을 a라고 하자.
나는 그날 인천공항에 a를 마중을 나갈 예정이었으나 출국이 거부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다음날 공항에 마중을 나갔다.
a는 출국을 거부당한 당한 당일, 나에게 전화를 해서 일이 이렇게 된 걸 일본의 교회분들에게 알리지 말고 자기를 무사히 만났다고 이야기해달라고 했다. 가능하면 자기가 교회분들에게 직접 상황을 설명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무슨 사정이 있나 싶어서 + 너무 오랜만에 일본어를 쓰는 관계로 전자도항서라는 서류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을 하지 못해서 그 부탁을 들어줬다.
화상회의 때 교회분들께 대충 잘 만났다고 얼버무렸지만 거짓말은 10초도 안되어 들키고 말았다. 이미 한국에 들어와있던 다른 목사님(이분은 한국인이라 전자도항서가 불필요했고 문제없이 출국함)이 회의에 참가중인 다른 멤버에게 a가 오늘 비행기를 못탔다는 사실을 이미 알렸기 때문.
회의에 참가한 멤버 중 하나는 나에게 거짓말을 시킨 a에게 크게 분노했다. 목사가 평신도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시킨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난했고, 크게 마음이 상해서 그 후로 몇주간 회의를 보이콧 했다.
나는 몇주간 전전긍긍했다. 아무생각없이 그 부탁을 들어주고 제3자를 크게 실족시킨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숨고싶었다. 애초에 본인이 직접 설명하고 싶은 이유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캐물어보지 않는 내 잘못이 크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결국 a는 자기의 실수와 부주의를 감추기 위해 나에게 거짓말을 시킨거였다. 그후로도 a는 지버릇 남주지 못하고 성도들을 실족시키며 자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살아가는 중이다.
요즘도 자주 생각한다. 나 때문에 a가 저렇게 됐나? 교역자로서 마땅히 자기가 해야할 일을 바쁘다는 이유로 나에게 미룬 적도 있고, 지금와서 돌이켜 보면 마음에 걸리는 게 한두가지가 아닌데, 그 당시에는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아무 생각없이 행동했던 것을 마음깊이 반성하는 중이다.
흔히 사람들은 상대방이 기뻐해주길 바라는 마음에, 혹은 자기가 미움받고 싶지 않기 때문에 사소한 부탁을 기꺼이 들어준다.
그러나 거절은 자기자신만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서도 필요할 때가 있다는 걸 이 경험을 통해서 배우게 되었다.'Journal'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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